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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탁월한 설교자요 전도자요 목회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3절)
무엇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두려워 떨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자기의 설교를 통해 전해지는 예수님이 그릇된 예수님이 될까 두려워했습니다.
자기 설교를 통해 고린도교인들이 잘못된 예수님을 받아 들일까 두려워했습니다.
자기 설교를 통해 예수님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랑이 드러날까 두려워했습니다.
자기 설교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지혜를 전하는 것이 될까 두려워했습니다.
이런 두려움이 있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큰 부흥은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큰 부흥은 누구로부터 시작됩니까?
건물이나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오로지 말씀을 들을 귀를 가진 사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부흥은 다른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부흥은 허다한 말이 아니라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능력입니다.
바울이 전한 말씀을 통해 능력의 이름되시는 예수님이 주시는 부흥응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설교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는 전파하기 위해 당시에 유행하던 설득력있는 수사학이나
영리한 철학적 논증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단순하게 선포했습니다.
왜 바울은 세상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동원하여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행여나 그런 것을 동원하다가 복음의 핵심을 놓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것만 전하는 것이 복음 전도자의 사명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가리울 수 있는 그 어떠한 것도 다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통해 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습니까?
그것은 나의 말과 삶을 통해 복음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가 보이지 않고,
나의 말과 삶을 통해 인간적인 자랑이나 교만함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 나를 쳐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해 예수와 십자가를 팽개쳐버리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나의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해 교회를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기 보다는
내 뜻을 이루기 위해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자부하는 내 안에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겸손함은 사라지고,
남을 나보다 더 못하게 여기는 오만함과 교만함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사도 바울은 엄청난 은사를 가진 사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자기가 가진 힘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파할 때 자신의 힘을 과시하면 그 힘을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철저한 무력함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스스로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진 연약함이나 자기가 당한 고난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기시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더 힘있게 증거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수 많은 복음 선포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적어집니까?
주위에 대형교회는 많아지는데도 불구하고 왜 예수 믿는 사람은 줄어듭니까?
그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선포자가 자신을 높이면 높일수록 하나님의 영광은 더 가려지고 맙니다.
복음을 듣는 자가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말로 들으면 변화가 없습니다.
복음 선포자가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과시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사라집니다.
복음을 듣는 자가 설교를 통해 나타나는 능력을 설교자의 능력으로 착각하면 변화가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 선포자가 자신을 낮추면 날출수록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은 더 크게 드러납니다.
복음을 듣는 자가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설교자를 통해 피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선포되고,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이 들리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때
성령님은 여러분들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주시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역사를 나타내십니다.
하루는 아기 낙타가 엄마 낙타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왜 나는 이렇게 커다란 발가락이 세 개나 되나요?”
엄마 낙타가 대답했습니다.
“사막을 건널 때 부드러운 모래 더미 위에서 미끄러지지 말라고 있는 거란다.”
“그럼 눈썹은 왜 이렇게 길어요?”
“사막을 건너는 동안 모래가 눈 속에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서지.”
“그럼, 등에 혹은요?”
“그건 건조한 사막을 건널 때 필요한 물을 저장해 두기 위해서란다.”
아기 낙타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멋져요, 엄마. 큰 발이 있어서 미끄러지지 않고,
긴 눈썹이 있어서 눈에 모래도 안 들어가고,
혹이 있어서 물을 저장해 둘 수 있으니까요. 근데 엄마….”
“응, 아들아?”
“왜 우리는 동물원에 있어요?”
우리 모두가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질문입니다.
우리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귀한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은혜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 예수님을 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왜 자꾸만 교회 안에서 누가 잘했는냐 못했느냐를 놓고 티격태격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말과 삶을 통해 예수님의 구세주되심을 보여주어야할 곳은 교회 안이 아니라 세상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음을 증명해야할 곳은 교회 안이 아니라 세상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스트레스를 교회로 가져와서 교인들을 대상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이 아니라,
들려지는 말씀을 통해 깨달은 능력의 이름 예수를 세상에 나아가 담대히 전하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듣고 배운 능력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복음을 들고 땅끝까지 나가서 이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